BLACK MACHINE : 잔상각인기계

107 x 40 x 70 (cm)
steel, stainless steel, aluminium, PLA, arduino, motor, LED

초등학교 2학년 때 컴퓨터가 생겼다. 틈만 나면 무서운 사진이나 공포 플래시 게임들을 찾아보던 나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겁이 많았다. 대낮에 가족들이 거실에 나와 있는데도 바로 옆에 있는 불 꺼진 컴퓨터 방에 들어가지 못했고, 가족 한 명을 불러서 같이 방에 들어가 불을 켰더라도 큰 이불을 뒤집어써야만 컴퓨터 전원을 켤 수 있었다.

멀티탭 전원을 켜면 스피커에 노란불이 켜지며 들리는 지지직 소리와 데스크탑이 부팅될 때 울리는 낯선 소음, 그리고 깜깜한 모니터에 창백한 알파벳들이 딱딱하게 입력되며 화면을 순식간에 채워버리는 장면은 차마 이불 없이는 마주할 수 없는 공포였다. 숨구멍도 내놓지 않은 이불 속에서 숨죽여 견디다 보면 직조된 섬유 틈새로 투과된 윈도우 화면의 푸른 빛을 통해 버퍼링 화면까지 무사히 넘어갔음을 알게 되고, 거기서 몇 초가 더 지나 배경 화면으로 전환되는 평안한 사운드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불 틈을 작게 벌려 확인한 다음 머리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 불규칙한 빈도로
안전 모드
안전 모드(네트워킹 사용)
안전 모드(명령 프롬프트 사용)
이라는 경고 메시지나 서슬 퍼런 블루스크린이 화면 한가득 튀어나와 있으면 쥐어 짜낸 용기로 엄마를 외쳐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유독 무서워했던 불 꺼진 방과 모니터 화면에는 검은 배경이 있었다. 컴퓨터가 깊숙이 새겨버린 기억은 검은 배경을 일종의 전조로, 호기심에 수없이 찾아봤던 무서운 이미지들이 선명한 잔상으로 떠오르게끔 기능했던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컴퓨터로 기계 설계를 하며 무서운 걸 봐도 공포를 느끼지 못하지만, 여전히 나는 잠들기 직전에는 머리끝까지 이불 속에 들어 있어야 하고, 명령 프롬프트 창에 띄워진 메시지는 괜시리 기묘한 느낌이 들고, 심심한 시간을 보낼 때면 검색창에 ‘공포’나 ‘무서운’ 따위의 단어를 붙여서 나온 콘텐츠를 틀어 놓곤 하는데.. 어쩌면 9살의 나는 내 안에 바이러스를 심어버린 게 아닐까.

<BLACK MACHINE : 잔상각인기계>는 어릴 적 심어놓은 바이러스도 소프트웨어라는 생각으로, 외부 세계에서 구동시키고자 맞춤 설계한 기계 장치다. 장치는 크게 조명부와 플립 북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전원을 켜면 조명부에 설치된 붉은 램프가 빠르게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며, 그 앞에서는 플립 북 페이지들이 끊임없이 넘어가기 시작한다. 얇고 투명한 플라스틱판들이 쉴 새 없이 부딪치는 소음과 함께, 빛이 켜지는 순간마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페이지들의 움직임으로 강박적인 잔상을 각인시킨다.